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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새벽에 전화하지 마라 슬픔은 수신자부담이다한때 나는 은하수에 살던 금빛 물고기였다갈 때 가더라도 외상 술값은 갚고 갈 것이다 첫 행부터 파격적인 감성이 묻어난다. 누구나 새벽에 전화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피치 못할 정도로 급한 일이거나,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기쁜 일이라면 굳이 새벽에 하지 않을 것이다. 한 때 은하수에 살던 금빛 물고기라면 좋은 호시절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는 외상값을 독촉하는 전화처럼 나를 믿지 못하여 하는 전화일 것이기에 ‘갈 때 가더라도 외상 술값은 갚고 갈 것이다’처럼 자기의 다짐을 내보이고 있는 신세가 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은 항상 쫓기며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새벽에 전화를 받는 슬픔은 수신자 부담일 수밖에 없다.
도서출판 b의 ‘b판시선’으로 조길성 시인의 신작 시집 나는 보리밭으로 갈 것이다 가 출간되었다. 조길성 시인이 첫 시집 징검다리 건너 (2010) 이후 7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이다. 시집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54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한국 현대시의 전통 가운데 하나가 정조의 여성성이다. 김소월, 한용운을 시작으로 대개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시들은 일단 외형적으로 여성적 어조를 갖고 있다. 그러한 차원에서 서정시는 여성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조길성 시인의 시들의 어조는 강한 남성적 톤을 갖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물론 남성적 어조를 드러내는 시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그 강렬함에서 돌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조길성 시인은 자신의 시에 묵직한 저음의 남성적 톤으로 외로움이나 슬픔, 어둠, 가난 등과 같은 어찌 보면 감상적인 듯한 시적 메타포를 깔아놓는데, 자칫 가볍게 읽으면 낡은 ‘엄살’로 읽히기 십상이다. 그러나 조금만 집중하여 읽노라면 묵직한 감동이 출렁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사인은 시집의 추천사에서 극한의 울분과 허기 속에서 농축된 시편들이, 고요는 고요인 채, 분노는 분노인 채로 처절하고 동시에 예민하다. 나아가 일말의 협기(俠氣)마저 수반하는데, 협과 시의 길이 둘이 아닌 때문일 것이다. 발분을 동력으로 삼되 목숨을 걸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는 것. 진검의 돌이킬 수 없음과, 그러므로 마땅히 두려워하고 민감해야 함을 그의 시들은 몸으로 익혀 있다. 자기연민을 절제하는 능력 역시 마찬가지. 우리 시가 귀한 시집을 하나 얻었다. 고 상찬하고 있다.

외로움이나 슬픔, 어둠, 가난 따위 역시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그 주제를 통하여 시적 성취를 얻고자 할 때 생의 한 경계를 필사적으로 통과해 보지 않고서는 다가설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익숙한 주제에서 감동을 길어 올릴 수 있기 위해서는 깊고 예리한 진정성과 핍진한 현실적 감각이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집에 실린 「허기」, 「식구」, 「성님성님하면서 눈이 내릴 때」 등의 시편들에서 우리는 그 깊이와 진정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시인 정우영은 해설에서 열거한 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을 하고 있다. 그 시들은 조길성 시의 미래를 예감케 한다. 감동 실린 울림이 여러 갈래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늘과 허기가 그의 중요한 자산이라고 해도, 더러는 이 시처럼 천연덕스러운 낙천성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 시는 회상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현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점이 무척 중요하다. 그의 발이 세상을 딛고 있기 때문이다. 고 말이다.


시인의 말 5

제1부

은하수 13
수탉 14
격파 15
물매화 16
놋쇠황소 18
꽃을 쉬게 하세요 20
자연은 자꾸 냉정해만지고 21
세상 모든 얼굴 가진 것들 22
잘 가라, 첫사랑 물방울 벌레들아 24
쇠가 부드러우면 칼을 만들 수 없고 26
허기 28
비린내 29
입동 30
겨울바람에 낙엽이 31
여우고개 32
나는 보리밭으로 갈 것이다 34
낙숫물이 언젠가 지구를 뚫을 것이다 36
입춘 지나 어디쯤 38

제2부

식구 41
다녀오겠습니다 42
아무 데나 43
꽃밭에는 꽃들이 44
서글퍼서 45
용접 46
풍성갈비 47
지워질 것이다 48
말 달리자 49
대설풍경 50
폭설 51
성님성님하면서 눈이 내릴 때 52
다시 안면도에서 53
두루미는 물가에서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54
아직도 아궁이 불빛이 56
뜨거운 열매 58
피 대신 흐르는 것들 59
꽃 같은 세상 60

제3부

바늘 63
고요 65
첫사랑 66
아지랑이 67
몸살 68
호두 두 알 70
송아지 눈 속 깊은 우물을 본 적 있니 71
꽃소식 72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73
사과문 74
저녁이 오고 있다 저토록 아름다운 75
보라 76
불국사 77
너에게 가는 동안 78
중환자실 79
가을 편지 80
객사 82
문득 83

해설ㅣ정우영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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